익사하는 사람은 더 격렬하게 팔을 휘젓는다
행복을 과시하는 사람은 익사하고 있다.
SNS를 넘기다 보면 그런 사람들을 본다. 화려한 휴가지에서 찍은 사진, 완벽하게 세팅된 브런치, “나는 내 인생을 너무 사랑해”라는 캡션. 그들은 웃고 있다. 너무 환하게. 너무 자주. 너무 열심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행복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증명하려 들까?
물에 빠진 사람을 본 적이 있다면 안다. 그들은 조용히 가라앉지 않는다. 발버둥 친다. 팔을 휘젓는다. 마치 춤을 추듯 격렬하게. 멀리서 보면 즐거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즐거움이 아니다. 그건 비명이다.
“즐겨라!“는 명령은 과거의 “하지 마라!“보다 더 잔인하다.
현대 사회의 초자아(Superego)는 금지하지 않는다. 명령한다. “즐겨라!” “행복해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과거엔 쾌락을 느끼면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은 쾌락을 느끼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이게 바로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말한 현대 자본주의의 역설이다. 우리는 행복할 의무를 진다. 인생을 즐길 책임을 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증명한다. 나는 이 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나는 제대로 즐기고 있다고.
SNS의 행복 사진들은 숙제 검사다. 대타자(Big Other)에게 보여주는. 내가 명령을 잘 따르고 있다는 증거.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건 기쁨이 아니다. 불안이다. “내가 충분히 즐기고 있나?”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데?”
행복은 의무가 된 순간, 더 이상 행복이 아니다.
더 이상한 건 이거다. 그들은 정작 그 순간을 즐기지 않는다.
맛집에 가서 음식 사진을 찍는다. 멋진 풍경 앞에서 셀카를 찍는다. 파티에서 인스타 스토리를 올린다. 그들이 경험하는 건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다. 먹는 게 아니라 찍는다. 보는 게 아니라 올린다. 느끼는 게 아니라 전시한다.
지젝은 이걸 ’상호수동성(Interpassivity)’이라 불렀다. 내가 직접 즐기는 대신, 타자가 나를 대신해 즐기게 하는 것. 사진 속의 나는 완벽하게 웃고 있다. 화면 속의 나는 인생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스크린 밖의 나는? 좋아요 개수를 세고 있다. 댓글을 확인하고 있다. 불안해하고 있다.
이미지가 나를 대신해 행복해준다. 그래서 나는 면제된다. 삶을 직접 부딪혀 느껴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실재(The Real)와 마주해야 하는 고통으로부터. 대리인에게 즐거움을 위임한 삶. 그게 현대인의 초상이다.
하지만 여기 역설이 있다. 그렇게 쫓아다니는 행복은 절대 오지 않는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이걸 ’대상 a(objet petit a)’라 불렀다. 우리가 쫓는 것. 그것만 얻으면 완벽해질 것 같은 것. 하지만 절대 닿지 않는 것. 자본주의는 이 구조를 완벽하게 이용한다. “이것만 사면”, “저곳에만 가면”, “이걸 경험하면” 너는 행복해질 거라고 속삭인다.
지젝은 코카콜라(Coca-Cola)를 예로 든다. “이게 바로 그거야!(Coke is it!)” 광고는 외친다. 하지만 마셔보면 안다. 그건 결코 그것이 아니다.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목마르다.
새로운 핫플레이스를 찾아다닌다. 명품을 산다. 트렌드를 쫓는다. SNS에 올린다. “나 행복해!” 하지만 내면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강렬한 자극을 찾는다. 더 화려한 이미지를 만든다. 더 열심히 과시한다.
악순환이다. 쫓을수록 멀어진다. 채울수록 비어간다. 소진된다.
그들이 정말 피하고 싶은 건 뭘까?
실재다. 삶의 균열. 고통. 무의미함. 죽음. 우리 존재의 텅 빈 중심. 현대 사회는 이걸 직면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 하지 마!” “긍정적으로 살아!” “좋은 게 좋은 거야!”
이게 바로 유독한 긍정성(Toxic Positivity)이다. 실재를 덮어버리는 환상의 스크린. 자신의 삶에 드리운 그림자—우울, 불안, 실패—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계속 덧칠한다. 행복한 이미지를. 밝은 필터를.
“나 괜찮아!” “나 행복해!” “나 인생 즐기고 있어!”
하지만 그 외침은 비명에 가깝다. 텅 빈 내면에서 울리는 메아리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저런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면, 당신도 이미 같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라캉은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여된 존재라고. 완벽한 향유(Jouissance)는 불가능하다고. 우리 삶엔 어쩔 수 없는 구멍이 있다고. 문제는 이 구조를 깨달아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SNS에 과시 안 해. 나는 조용히 살아”라고 말하는 순간, 당신은 다른 형태로 같은 게임을 하고 있다. 과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다. 결여를 인정한다는 것으로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이것 역시 대타자를 향한 메시지다. “나 봐, 나는 깨달은 사람이야.”
지젝이라면 웃으며 말할 것이다. 탈출구는 없다고. 우리는 모두 이 구조 안에 있다고. 차이는 그걸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뿐이라고.
익사하는 사람이 발버둥을 멈추면 뜬다고? 천만에. 그냥 조용히 가라앉을 뿐이다. 물에 몸을 맡기는 것도, 결여를 받아들이는 것도, 해방이 아니다. 그저 다른 형태의 자기기만이다.
소음이 요란한 건 그 안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맞다. 하지만 침묵도 마찬가지로 비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