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서 그녀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친구에게 이야기해본 적 있는가. "그 사람이 말이야..." 하고 시작하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생생한 존재가 갑자기 멀어진 것 같다.
롤랑 바르트는 이 현상을 정확히 포착했다. 『사랑의 단상』에서 그는 연인을 '너'가 아닌 '그' 또는 '그녀'로 지칭하는 순간을 "사악한 대명사"의 등장이라고 불렀다. 단순한 호칭의 변화가 아니다. 존재의 변질이다.
'너'로 부를 때, 연인은 예측 불가능한 실재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고, 나와 대화하고, 반응한다. 하지만 '그녀'로 바뀌는 순간, 연인은 내 담론 속 대상이 된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면 "봉제 인형"이 된다. 텅 빈 인형, 내가 의미를 채워 넣을 수 있는 구조물.
이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 욕망의 방향이 바뀐다. 나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욕망하는 게 아니다. 나의 욕망 그 자체를 욕망한다. 그 사람은 내 욕망을 투영하기 위한 스크린일 뿐이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구축한 이미지, 내가 만들어낸 서사 속 등장인물.
바르트는 이를 "대상의 무효화"라고 불렀다. 사랑의 부피가 너무 커서 정작 사랑하는 대상은 그 무게에 짓눌려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사랑을 쏟을수록, 상대방이 자신의 언어로 말할 공간은 줄어든다. 바르트는 이렇게 썼다. "사랑의 담론은 타자를 질식시킨다."
친구에게 연인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그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사건은 서사가 된다. 현재에서 과거로 고정된다. 살아있던 경험이 박제된다.
서사화의 문제는 생명력의 상실이다. 사랑의 경험은 본질적으로 현재에 속한다. 예측할 수 없고, 정리할 수 없고, 의미로 환원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앞뒤가 맞는 이야기로 만들려고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소설처럼. 그 순간 경험은 죽는다.
바르트가 제3인칭을 "사악한 대명사"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 있다. 그것은 부재의 대명사다. 무효화의 대명사다. 연인이 '그녀'가 되는 순간, 그녀는 이미 거기 없다. 내 언어 속 구조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SNS에 연인과의 카톡을 캡처해서 올리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들은 무엇을 하는가. 살아있는 대화를 죽은 텍스트로 만든다. 상대방의 말을 맥락에서 떼어내고, 자신이 원하는 프레임 속에 가둔다. 그리고 "이게 맞냐"고 묻는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캡처를 올린 순간, 상대방은 변호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편집된 서사 속 악역으로 고정됐다.
이것이 바르트가 말한 질식이다. 사랑의 담론이 상대방을 감싸고, 압도하고, 결국 숨통을 끊는다. 주체는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담론의 폭정 속에 상대방을 가두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역설이 드러난다. 우리가 사랑에 대해 말하면 말할수록, 정작 사랑은 멀어진다. 담론이 풍성해질수록 대상은 빈곤해진다. 설명이 정교해질수록 경험은 추상화된다. 바르트의 표현대로 "모든 목소리와 기원의 파괴"가 일어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문제는 말하기 그 자체가 아니라 말하기의 방식이다. 내가 '너'를 '그녀'로 바꾸는 순간을 의식하는 것. 내 담론이 상대방을 어떻게 박제하는지 자각하는 것. 그리고 그 폭력성을 인정하는 것.
연인은 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다. 내 욕망을 채울 도구가 아니다. 내가 분석하고 설명할 대상이 아니다. 그는 예측 불가능한 타자다. 내 담론 밖에 있는 실재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존재다.
바르트는 사랑의 담론을 "극도로 고독한 담론"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나홀로 서사. 여기서 가치는 대상 안에 있지 않다. 그 대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욕망을 투영하는 주체의 뇌 속에 있다.
결국 '그녀'에 대해 말하는 순간, 나는 그녀가 아닌 나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욕망, 내 불안, 내 환상에 대해. 그녀는 이미 사라졌다. 내 언어의 감옥 속에 갇힌 이미지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