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함이라는 최고의 찬사

“너 진짜 무해하다.” 누군가 이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면 문제다. 이건 칭찬이 아니다. 이건 거세 증명서다.

언제부턴가 “무해함”이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사람들은 “착하다”, “재밌다”, “똑똑하다”보다 “무해하다”는 말에 환호한다. SNS에는 무해한 인간, 무해한 웃음, 무해한 대화라는 표현이 넘쳐난다. 마치 인간에게서 독성 물질을 검출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처가 된 것처럼 사람들은 서로를 검사하고, 합격 도장을 찍어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무해하다는 것은 본래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를 바꾸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가? 왜 이것이 사랑의 언어가 되었는가?

디카페인 인간의 탄생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현대 자본주의를 “카페인 없는 커피”의 논리로 설명했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되 잠 못 드는 부작용은 원하지 않는다. 맥주를 마시되 숙취는 원하지 않는다. 크림을 먹되 살찌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모든 쾌락에서 “악성분(malignant component)“을 제거하고 판다.

인간관계도 디카페인이 되었다. 우리는 관계를 원하되, 그 관계가 주는 충격과 변화와 고통은 원하지 않는다. 타인의 욕망이 나를 침범하지 않기를, 타인의 고통이 나를 요구하지 않기를, 타인의 실재(Real)가 나를 찌르지 않기를 바란다.

무해한 인간이란 정확히 이것이다. 카페인이 제거된 커피처럼, 인간에게서 “타자성(otherness)“을 제거한 상태. 예측 불가능성을 제거한 상태. 위험을 제거한 상태. 그는 더 이상 주체(subject)가 아니라 소비재(commodity)다. 나는 그를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를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다. 우리는 타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소비한다.

타자의 주이상스를 거세하라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불안(Anxiety)이 “결여의 결여”, 즉 타자가 너무 가까이 왔을 때 발생한다고 했다. 성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라캉은 정반대로 말한다.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이웃은 나와 다른 욕망을, 나와 다른 주이상스(과도한 향유)를 가진 괴물 같은 존재(Thing)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다. 현대인은 이 공포를 견딜 수 없다. 타인이 나를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 타인의 욕망이 나를 침범할 수 있다는 사실, 타인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해결책을 찾았다. 거세.

“너는 무해해”라는 말은 “너는 거세되었다”는 확인이다. 너는 나를 위협할 발톱이 없다. 너는 나를 찌를 송곳이 없다. 너는 나를 압도할 욕망이 없다. 나는 안전하다. 이것이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진짜 고백이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서로의 발톱을 뽑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

신화로서의 무해함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신화의 기능이 역사적·정치적인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무해함”은 현대의 가장 강력한 부르주아 신화다.

어떤 사람이 “무해하다”고 칭송받는 순간, 그의 비판적 날카로움은 사라진다. 그의 정치적 저항은 중화된다. 그의 사회적 분노는 “귀여운 것”으로 표백된다. 무해함이라는 이미지는 세제 광고의 거품처럼 인간관계의 필연적인 마찰과 갈등을 덮어버린다. 그것은 사회적 윤활유다. 그것은 어른들에게 물려진 고무 젖꼭지다.

무해한 인간은 정치적으로 무력한 인간이다. 그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그는 아무도 불편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는 시스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스템은 그를 사랑한다. 그래서 시스템은 그를 찬양한다. “무해함”의 숭배는 저항의 불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승인이다.

정신적 면역력의 붕괴

“무해하다”가 찬사가 된 진짜 이유를 말하자면, 사람들의 정신적 면역력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타자의 욕망이 주는 공포를 견딜 힘이 없다. 타자의 실재(Real)가 던지는 충격을 감당할 에너지가 없다. 우리는 너무 많이 다쳤다. SNS는 끝없이 타인의 고통을 전시한다. 트라우마는 정체성이 되었다. 상처는 화폐가 되었다. 모두가 자신의 고통을 증명하려 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라고 요구한다. 피로하다.

그래서 우리는 반작용으로 무해함을 갈망한다. 멸균실 같은 관계를 원한다. 면역 결핍 상태의 사회는 모든 바이러스를 차단하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위험을 제거하면 성장도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지젝이 독일의 안전한 놀이터와 한국의 위험한 놀이터를 비교했듯이, 주체는 실재(Real)와의 조우를 통해서만 성장한다. “무해한 세계”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삶 자체를 포기한 상태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위험을 원하지 않는다. 갈등을 원하지 않는다.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 똥을 원하지 않는다. 피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잘 씻겨진 인형을 원한다. 무해함을 원한다. 이미지를 원한다. 소비재를 원한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이것은 병적인 사회적 합의다. “서로를 건드리지(touch) 말자.” “각자의 자폐적인 쾌락 속에 머물자.” “우리는 나란히 있되, 서로를 침범하지 말자.” 이것이 무해함의 윤리가 말하는 진짜 메시지다.

접촉하지 않는 친밀함. 영향을 주지 않는 관계.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사랑. 이게 가능한가? 아니다. 이것은 친밀함이 아니다. 이것은 두 개의 단자(monad)가 서로를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관계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캡슐 안에서 혼자 떠다니고 있다.

맹수의 이빨을 뽑는 사람들

비유하자면 이렇다.

사람들은 맹수를 보았다. 무서웠다. 그래서 그들은 맹수의 이빨을 뽑았다. 하나씩,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톱도 깎았다. 하나씩, 천천히, 철저하게. 그리고 그 맹수가 힘없이 엎드려 있는 것을 보았다. 저항하지 않았다. 위협하지 않았다.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했다. “아, 정말 무해하고 사랑스럽다.”

그들은 그 맹수를 쓰다듬었다. 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렸다. “오늘 진짜 무해한 맹수를 만났어요. 너무 순하고 착해요. 이게 진짜 사랑 아닐까요?”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통제에 대한 도착적인(perverse) 만족이다. 그들은 맹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맹수를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로 축소시킨 것에 만족한 것이다. 그들은 타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 타자를 자신의 편안함에 맞춰 재단한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것이 상호적이라는 점이다. 너도 나의 이빨을 뽑고, 나도 너의 이빨을 뽑는다. 너도 나를 무해하게 만들고, 나도 너를 무해하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를 거세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존중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우리는 친밀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건드려지지 않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다. 영향받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우리는 유령과 유령의 춤을 추고 있다. 홀로그램과 홀로그램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리고 외로움을 느낀다.

당연하다. 유령은 나를 건드릴 수 없다. 홀로그램은 나를 바꿀 수 없다. 무해한 것은 나를 살아있게 만들 수 없다.

집단적 퇴행

“무해하다”가 최고의 찬사가 된 이 시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이것은 진보가 아니다. 이것은 집단적 퇴행이다. 우리는 삶에서 삶을 제거했다. 관계에서 관계를 제거했다. 사랑에서 사랑을 제거했다. 남은 것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껍데기뿐이다.

디카페인 커피는 여전히 커피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것은 커피가 아니다. 그것은 커피의 유령이다. 마찬가지로 무해한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유령이다.

우리는 서로의 유령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홀로그램을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외로움을 느낀다. 당연하다. 유령은 나를 건드릴 수 없다. 홀로그램은 나를 바꿀 수 없다. 무해한 것은 나를 살아있게 만들 수 없다.

결국 무해함의 찬양은 삶에 대한 거대한 포기다.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상처받을 수 있다. 변할 수 있다.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짜 삶이다. 무해함 속에는 삶이 없다. 거기에는 오직 안전한 죽음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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