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법 지적하는 사람들의 정체

당신이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끝냈다. 내용은 탄탄했다. 논리는 명확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손을 든다. "그건 '~에 반해'가 아니라 '~에 비해'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진다. 당신이 말하려던 핵심은 증발한다. 남는 건 어색함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맥락을 놓치고 용어를 잡는다. 의미를 무시하고 맞춤법을 교정한다. 당신이 무엇을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말했는지만 중요하다. 그들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철학은 정반대를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이 평생 고민한 문제가 이거다. 언어란 무엇인가. 그의 초기 저작 『논리철학논고』에서 그는 언어를 거울처럼 봤다. 단어는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하나의 단어에는 하나의 명확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의미는 사용이다(Meaning is Use)." 단어의 의미는 사전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실제 삶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이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로 결정된다. 축구를 보라. 공이 골대에 들어가면 골이다. 누가 공을 찼는지, 어떤 각도로 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규칙에 맞춰 게임이 진행되면 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면" 그 언어 게임은 성공한 거다.

맞춤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언어를 사전처럼 본다. 모든 단어에는 불변의 정의가 있다고 믿는다. 이건 본질주의적 오류다.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을 보라. "게임"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라. 축구는 게임이다. 체스도 게임이다. 술래잡기도 게임이다.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본질이 있는가? 없다. 그냥 여러 특징들이 겹치고 얽혀 있을 뿐이다. 마치 가족 구성원들의 얼굴처럼.

언어는 유동적이다. 맥락에 따라 변한다. 단어의 정의를 들이대며 소통을 막는 것은, 축구 경기 중에 "공의 가죽이 규격에 맞지 않다"며 경기를 멈추는 것과 같다.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거다.


언어는 사전이 아니라 게임이다. 게임의 목적은 이기는 게 아니라 계속 진행하는 것이다.


도널드 데이비드슨(Donald Davidson)은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 그는 "자비의 원리(Principle of Charity)"를 제시했다. 타인의 말을 이해하려면, 상대가 합리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거다. 맞춤법이 틀렸든, 용어 선택이 어색하든, 일단 상대방의 의도를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하라. 그게 해석의 기본이다.

맞춤법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한다. 그들은 상대의 실수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걸 꼬투리 잡는다. 데이비드슨에 따르면 이건 똑똑함의 증명이 아니다. 해석 능력의 결핍이다. 진짜 지능은 불완전한 언어에서도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이다. 사소한 오류에 집착하는 건, 큰 그림을 못 보는 거다.

데이비드슨은 "급진적 해석(Radical Interpret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전을 들이대며 채점하는 게 아니다. 상대방의 신념과 의미를 동시에 파악해 나가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외국인이 당신에게 "비 오다, 나 집 가다"라고 말했다고 치자. 문법은 엉망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해한다. "비가 와서 집에 간다"는 의미를. 이게 진짜 소통이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더 나아간다. 그는 언어를 "사전(Dictionary)" 모델이 아니라 "백과사전(Encyclopedia)" 모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전 모델은 단순하다. "A는 B다"라고 정의하면 끝이다. 하지만 실제 언어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단어의 의미는 문화적 맥락, 역사, 관습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건 리좀(Rhizome) 구조다.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식물처럼, 의미는 무한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과"라는 단어를 보라. 사전적 정의는 "사과나무의 열매"다. 하지만 실제로는? 뉴턴의 만유인력, 백설공주의 독사과, 애플 회사의 로고,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말 "oh wow"까지 연결된다. 이 모든 의미의 연쇄를 무시하고, "사과는 과일이다"라는 정의만 고집하면 뭘 놓치는가? 전부다.

에코는 이걸 "무한 세미오시스(Unlimited Semiosis)"라고 불렀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 계속 다른 의미로 미끄러진다. 맥락을 무시하고 사전적 정의만 고집하는 것은, 거대한 미로 앞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모든 철학적 분석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한 것. 맞춤법과 용어에 집착하는 건 언어 문제가 아니다. 권력 문제다.


그들은 당신과 대화하는 게 아니다.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사회의 권력 구조를 분석했다. 과거의 권력은 명시적이었다. 왕이 칼을 들고 명령했다. 하지만 근대의 권력은 다르다. 규범(Norm)을 통해 작동한다.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비정상을 교정한다. 감옥, 학교, 병원, 공장. 모두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개인을 관찰하고, 평가하고, 규율한다.

맞춤법과 표준어 규정도 마찬가지다. 이건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권력 행사를 위한 도구다. 당신이 맞춤법을 틀렸을 때, 누군가가 지적한다. 그 순간 당신은 "비정상"이 된다. 교정 대상이 된다. 상대방은 "정상"의 위치에 선다. 권력을 쥔다.

푸코는 이걸 "미시 권력(Micro-physics of power)"이라고 불렀다. 일상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는 작은 권력들. 맞춤법 지적은 그중 하나다. 그들은 당신을 가르치고 훈육하여 "순종적인 신체(Docile bodies)"로 만들려 한다. 푸코가 말한 근대 권력의 목표가 이거다. 물리적 강제 없이, 개인이 스스로를 감시하고 규율하게 만드는 것.

회의실에서 당신의 맞춤법을 지적한 사람을 다시 보라. 그는 언어의 순수성을 지키는 게 아니다.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신을 "무지한 사람"으로 낙인찍고, 자신을 "아는 사람"으로 위치시킨다. 이건 소통이 아니다. 위계 세우기다.

흥미로운 건, 이런 사람들이 정작 언어의 본질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거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 게임"의 목적을 모른다. 데이비드슨이 말한 "해석의 기술"이 없다. 에코가 말한 "의미의 무한성"을 보지 못한다. 푸코가 폭로한 자신의 권력욕은 더더욱 자각하지 못한다.

맞춤법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언어의 규칙은 외웠지만 언어의 목적은 이해하지 못했다. 게임의 규칙서를 달달 외웠지만 게임을 해본 적은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경기장에 들어와서는 규칙서를 펼쳐들고 다른 선수들의 발 모양을 검사한다. 공이 어디로 가는지는 보지 않는다.

더 아이러니한 건, 그들이 자신을 언어의 수호자라고 믿는다는 거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데이비드슨, 에코, 푸코가 보기엔 정반대다. 그들이야말로 언어를 가장 폭력적으로 다루는 사람들이다. 소통을 죽이고, 의미를 놓치고, 권력을 행사한다. 언어를 지킨다고 믿으면서 실제로는 언어의 본질을 파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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