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왔다. "요즘 대세는 이거지." 댓글이 달린다. "인정", "ㄹㅇ", "팩트". 우리는 이걸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그게 대세구나." 그런데 잠깐. 누가 정했나. 누가 대세라고 결정했나. 글쓴이? 댓글 단 세 명? 아니다. 아무도 정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스토리 조회 목록을 확인한다. 120명이 봤다. 안심한다. 50명만 봤으면 불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120명과 50명의 차이가 뭔가. 120명이 정말 내 삶을 승인했나. 아니다. 그들은 그냥 화면을 넘겼다.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본다. "다들 이거 보고 있구나." 그래서 나도 본다. 그런데 '다들'이 누군가. 몇 명이 검색하면 1위가 되는가. 알고리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모른다. 그냥 1위니까 중요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이 대타자다. 라캉(Jacques Lacan)이 말한 그 대타자. 대타자는 실체가 아니다. 구조다. 우리의 욕망과 판단을 조직하는 상징적 질서. 과거엔 신이 대타자였다. "신이 보고 계신다." 그래서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도 바르게 행동했다. 그다음은 국가였다. 법이었다. 이데올로기였다. 2026년의 대타자는 다르다. 더 분산적이고, 더 즉각적이고, 더 가짜같이 보이지만 더 강력하다.

커뮤니티 여론이 대타자다. 거기엔 실제로 몇 명이나 있는가. 활발하게 글 쓰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나머지는 읽기만 한다. 그런데 그 열 명의 목소리가 "우리 모두의 의견"처럼 작동한다. "커뮤니티에서 이렇게 말하더라." 이 문장이 권위를 갖는다. 누가? 열 명이. 그런데 그 열 명은 각자 다른 이유로 다른 맥락에서 말했다. 통일된 의견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목소리로 듣는다.

실시간 트렌드가 대타자다. 트위터 트렌딩, 유튜브 급상승,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이것들은 "지금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제론 알고리즘이 정한다. 알고리즘은 무슨 기준으로 정하나. 참여도? 클릭률? 광고주의 이해관계? 모른다. 공개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 뜬 것을 중요하다고 받아들인다. 대타자가 정했으니까.

스토리 조회 목록이 대타자다. 120명의 얼굴이 뜬다.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내 스토리를 봤다. 심심해서, 습관적으로, 특정 이유 없이. 그들 사이엔 연결이 없다. 그들은 나를 평가하기 위해 모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겐 그들이 하나의 심판단으로 보인다. "120명이 나를 봤다." 이것이 내 존재를 증명한다. 라캉의 거울 단계다. 아이가 거울을 보고 엄마를 쳐다본다. "이게 나 맞죠?" 엄마가 끄덕여야 아이는 안심한다. 120명이 끄덕였다. 나는 존재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이 구조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인가. 커뮤니티 여론이라는 통일된 실체는 없다. 몇 명의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실시간 트렌드를 결정하는 명확한 대중은 없다. 알고리즘이 계산한 숫자가 있을 뿐이다. 스토리 조회자들이 하나의 평가단은 아니다. 흩어진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대타자는 우리가 만든 허구다.

그런데 이 허구가 작동한다. 왜? 우리가 그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이 실제로 존재했나.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이 보고 있다고 믿고 행동했다. 신은 그렇게 권력이 됐다. 커뮤니티 여론도 마찬가지다. "커뮤니티에서 이렇게 생각한다"는 가정이 우리의 의견을 조정한다. 실시간 트렌드도 마찬가지다. "다들 이걸 보고 있다"는 가정이 우리를 그곳으로 끌고 간다.

이게 2026년 대타자의 특징이다. 과거의 대타자는 명확했다. 신, 국가, 법. 눈에 보이는 권위가 있었다. 지금의 대타자는 흐릿하다. 커뮤니티, 트렌드, 조회 목록.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강력하다. 명확한 것은 반박할 수 있다. 흐릿한 것은 반박할 수 없다. "커뮤니티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누구에게 대항하나. 커뮤니티가 누군데. 알 수 없다. 그래서 대항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대타자를 내면화한다. 스토리를 올리기 전에 검열한다. 이 사진이 괜찮을까. 이 멘트가 적절할까. 누구에게 묻는 건가. 120명에게? 아니다. 내가 상상한 120명의 기대에게 묻는다. 커뮤니티에 글을 쓰기 전에 고민한다. 이게 대세에 맞나. 여론에 부합하나. 어떤 여론? 실제론 없다. 내가 상상한 여론이다. 트렌드를 확인한다. 지금 중요한 게 뭐지. 누가 정한 중요함?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이 뭔지도 모르면서 따른다.

라캉은 이걸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걸 욕망하지 않는다. 타자가 나한테서 원할 것 같은 걸 욕망한다. 내가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가. 정말 내가 좋아하나. 아니면 그게 대세라서 좋아하는 척하나. 구분이 안 된다. 내 욕망과 타자의 욕망이 뒤섞였다. 이게 대타자의 힘이다. 명령하지 않아도 우리가 알아서 따른다.

그런데 여기서 웃긴 점이 있다. 우리는 이걸 안다. 커뮤니티 여론이 소수의 목소리란 걸 안다. 트렌드가 알고리즘이 만든 환상이란 걸 안다. 조회 목록이 무의미한 숫자란 걸 안다. 다 안다. 근데 계속한다. 지젝이 말한 "나는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구조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몰라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면서도 행동하기 때문에 작동한다.

왜 그럴까. 대타자 없이는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뭐가 중요한지, 내가 누구인지. 이 모든 걸 혼자서 결정할 수 없다. 기준이 필요하다. 대타자가 그 기준이다. 대타자가 허구라는 걸 알아도 상관없다. 허구든 실재든,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대타자가 정말 필요한가. 커뮤니티 여론 없이는 의견을 가질 수 없나. 트렌드 없이는 관심을 가질 수 없나. 조회 목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나.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도록 훈련됐을 뿐이다. 대타자는 우리를 편하게 만든다. 내가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 대타자가 판단해준다.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대타자가 정했으니까. 이 편안함이 우리를 가둔다.

극복은 간단하다. 간단하지만 어렵다. 대타자를 무시하는 것이다. 커뮤니티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다. 소수의 목소리일 뿐이다. 트렌드가 뭐든 상관없다. 알고리즘이 만든 환상일 뿐이다. 조회 수가 얼마든 상관없다. 무의미한 숫자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건 쉽다. 실행하는 건 어렵다. 왜? 우리는 대타자를 너무 깊이 내면화했다. 그것 없이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어렵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다. 시작은 인식이다. 내가 지금 대타자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 스토리 올리기 전에 "이게 괜찮을까" 고민할 때, 멈추고 묻는다. 누구한테 괜찮아야 하는데? 120명? 그들이 누군데. 그들이 왜 내 기준이 되는데. 커뮤니티 글 쓰기 전에 "여론에 맞나" 고민할 때, 멈추고 묻는다. 어떤 여론? 열 명의 목소리? 그들이 왜 내 의견을 정하는데.

이 질문을 반복하면 보인다. 대타자는 텅 비어 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몇 명의 사람, 몇 개의 숫자, 몇 줄의 코드. 그게 전부다. 우리가 거기에 권위를 부여했다. 우리가 만든 환상이다. 환상은 깰 수 있다. 깨는 순간 자유가 온다. 진짜 자유. 타자의 승인 없이 존재하는 자유. 트렌드 없이 관심 가지는 자유. 여론 없이 의견 가지는 자유.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정말 이해하면, 정말 내면화하면, 모든 게 바뀐다. 커뮤니티 의견이 좆도 아니게 된다. 실시간 트렌드가 좆도 아니게 된다. 스토리 조회 수가 좆도 아니게 된다. 그들은 권력이 아니다. 그냥 정보다. 참고사항일 뿐이다.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내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 없이도 존재한다. 나는 그것들과 상관없이 가치 있다.

2026년을 산다는 것은 이 깨달음과의 싸움이다. 대타자는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새로운 플랫폼, 새로운 지표, 새로운 트렌드. 하지만 구조는 같다. 항상 같다. 누군가 당신에게 "이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묻는다. 누가 정했나. 답이 명확하지 않으면, 그건 대타자다. 그리고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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