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크툴루를 본 사람은 미치는가

H.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크툴루를 본 사람은 미친다. 예외가 없다. 과학자든, 선원이든, 탐험가든 상관없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언어를 잃는다. 논리를 잃는다. 자아를 잃는다.

이건 단순한 공포 장치가 아니다. 러브크래프트는 우연히 정신분석학의 핵심을 건드렸다. 자크 라캉이 평생 설명하려 했던 것.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무너지는가.

라캉은 인간의 정신을 세 개의 영역으로 나눴다. 상징계(Symbolic), 상상계(Imaginary), 실재(Real). 이 세 개가 엮여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든다. 크툴루는 이 구조를 박살낸다. 정확히 말하면, 실재가 상징계와 상상계를 찢고 들어온다.

실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라캉의 정의를 빌리면 "상징화에 절대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언어로 포착할 수 없고, 개념으로 담을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상징계다. 언어, 법, 과학, 논리. 이 모든 것이 상징계에 속한다. 실재는 이 바깥에 있다. 아니, 정확히는 밑에 있다. 상징계가 덮어놓은 것 밑에.

크툴루는 바로 이 실재의 형상이다. 러브크래프트가 크툴루를 묘사할 때 반복해서 쓰는 단어들이 있다. "형언할 수 없는(indescribable)", "이름 붙일 수 없는(unnameable)",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건 수사적 장치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다. 크툴루는 언어가 멈추는 지점에 있다.

사람들은 흔히 크툴루를 "거대한 문어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소설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건 근사치일 뿐이다. 러브크래프트는 계속 말한다. 그것은 문어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우리의 언어 체계로는 그것을 담을 수 없다. 이게 핵심이다.

라캉은 이런 대상을 "다스 딩(Das Ding)"이라고 불렀다. 독일어로 "사물"이라는 뜻이다. 프로이트에게서 빌려온 개념이다. 다스 딩은 상징계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아기가 언어를 배우기 전, 세계가 아직 이름으로 나뉘기 전의 상태. 거기에는 형체가 없다. 경계가 없다. 의미가 없다. 라캉은 이것을 "형체 없는 물질(formless substance)"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언어가 만든 허구다. 크툴루는 그 허구를 찢는다.


크툴루를 본 사람이 미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들의 상징계가 무너진다. 언어가 작동을 멈춘다. 그들은 본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사고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하지만 크툴루를 본 사람은 침묵할 수 없다. 그들은 본 것을 말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반복해서 실패한다.

이게 정신병의 구조다. 라캉에 따르면 정신병은 상징계의 근본적인 실패다. 그는 이것을 "폐제(Foreclosure)"라고 불렀다. 정상적인 정신 발달에서는 "아버지의 이름(Name-of-the-Father)"이라는 상징적 권위가 실재를 억압한다. 법이 질서를 만든다. 언어가 세계를 나눈다. 하지만 이 상징적 권위가 작동하지 않으면? 실재가 직접 돌아온다. 그것이 바로 환각이다. 망상이다.

크툴루 신화는 이 구조를 우주적 규모로 확대한다. 인간 문명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상징계다. 과학, 종교, 법, 도덕.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한다. "우주는 이해 가능하다. 세계에는 질서가 있다. 인간은 특별하다." 하지만 크툴루가 깨어나면? 이 모든 상징적 질서가 무의미해진다. 우주에는 우리를 위한 법이 없다. 우리를 보호할 신도 없다. 우리는 그저 우연히 존재하는 먼지일 뿐이다.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공포는 이거다.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우주 자체가 실재다. 상징화할 수 없는 거대한 무의미의 덩어리. 우리의 문명은 그 위에 얹은 얇은 막에 불과하다.

크툴루의 문어 같은 머리도 우연이 아니다. 라캉은 문어 이미지를 언급했다. 문어는 기괴하다(Uncanny). 왜? 형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뼈가 없다. 경계가 모호하다. 촉수가 꿈틀거린다. 라캉은 이것이 "조각난 신체(fragmented body)"의 이미지라고 봤다. 인간의 자아는 통일된 신체 이미지 위에 세워진다. 거울 단계에서 아기는 자신의 몸을 하나의 전체로 인식한다. 이게 상상계의 기초다. 나는 하나다. 나는 경계가 있다. 나는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크툴루는 이 통일성을 파괴한다. 그것의 신체는 하나가 아니다. 경계가 없다. 어디까지가 머리이고 어디부터가 촉수인지 알 수 없다. 점액질이 흘러내린다. 형태가 계속 변한다. 이것을 보는 순간, 인간의 상상계도 무너진다. 내가 하나라는 믿음이 흔들린다. 나와 타자의 경계가 흐려진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딥 원(Deep Ones)"을 보라. 인간과 물고기의 혼종. 처음에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점점 변한다. 피부가 비늘로 바뀐다. 눈이 튀어나온다. 결국 바다로 돌아간다. 이건 인간 정체성의 붕괴를 형상화한 것이다.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 내가 나라는 믿음. 이게 다 거짓말일 수 있다는 공포.

라캉은 말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 있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곳에 있지 않다." 우리의 자아는 허구다. 언어와 이미지가 만든 구성물일 뿐이다. 크툴루는 이 허구를 벗겨낸다.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라고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정신병은 너무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너무 적게 잊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산다. 왜? 실재를 잊고 살기 때문이다. 상징계라는 스크린이 실재를 가린다. 우리는 그 스크린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뉴스를 본다. 출근한다. 회의에 참석한다. 저녁을 먹는다. 이 모든 것이 상징계 안에서 일어난다. 실재는 억압되어 있다. 잊혀져 있다.

하지만 가끔 실재가 균열을 통해 새어 나온다. 교통사고, 죽음, 재난. 라캉은 이것을 "투케(Tuché)"라고 불렀다. 피할 수 없는 외상적 조우. 그 순간 상징계의 질서가 일시적으로 멈춘다. 사람들은 말을 잃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반복한다. 이게 실재와의 조우다.

크툴루는 영구적인 투케다. 일시적인 균열이 아니라 완전한 붕괴. 상징계가 영원히 복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본 사람은 미친다. 그들은 상징계로 돌아올 수 없다. 실재의 사막에 갇힌다.

라캉은 말했다. 실재는 "주이상스(Jouissance)의 사막"이라고. 주이상스는 쾌락을 넘어선 향유다. 죽음 충동과 섞인 과도한 쾌락. 견딜 수 없는 강도. 크툴루는 이 주이상스의 덩어리다. 그것을 보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처리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다.

러브크래프트는 평생 불안에 시달렸다. 공황 발작, 악몽, 대인 공포. 그는 자신의 불안을 우주적 공포로 번역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것은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니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라캉의 구조를 재현했다. 실재, 상징계, 상상계.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무너지는가.

크툴루 신화가 계속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취약한지. 상징계라는 막이 얼마나 얇은지. 그 밑에 실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크툴루는 그 실재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에.

아이러니다. 크툴루라는 이름 자체가 모순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에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래서 작동한다. 우리는 실재를 직접 마주할 수 없다. 상징화할 수밖에 없다. 크툴루라는 기표는 실재를 가리키지만 닿지 못한다. 그 간극이 공포를 만든다.

정신분석은 이 구조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 그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정신 건강이라는 것.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그 환상이 찢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 크툴루는 그 순간을 영원히 연장한 것이다. 찢어진 환상 너머를 보는 것.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것.

러브크래프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이야기는 "The Haunter of the Dark"였다. 주인공은 창문 너머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본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다. 말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그는 죽는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The end has come." 끝이 왔다. 상징계의 끝. 언어의 끝. 자아의 끝. 실재만 남는다.

Read more

맞춤법 지적하는 사람들의 정체

당신이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끝냈다. 내용은 탄탄했다. 논리는 명확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손을 든다. "그건 '~에 반해'가 아니라 '~에 비해'입니다." 회의실이 조용해진다. 당신이 말하려던 핵심은 증발한다. 남는 건 어색함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맥락을 놓치고 용어를 잡는다. 의미를 무시하고 맞춤법을 교정한다. 당신이 무엇을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By sinthome

우리는 왜 타인의 이별을 팝콘을 먹으며 보는가?

환승연애4가 화제다. 시청률이 높다. 댓글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런데 뭘 보는 건가. 사랑? 아니다. 우리는 고통을 본다. 프로그램의 구조를 보면 명확하다. 전 연인들을 한 공간에 넣는다. 그들에게 과거를 꺼내라고 한다. X룸이라는 장치로 상처를 파헤친다. 이별의 이유, 배신의 순간, 눈물. 이 모든 것이 카메라에 잡힌다. 김인하 PD는 이렇게 말했다. "X룸은

By sint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