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타인의 이별을 팝콘을 먹으며 보는가?
환승연애4가 화제다. 시청률이 높다. 댓글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런데 뭘 보는 건가. 사랑? 아니다. 우리는 고통을 본다.
프로그램의 구조를 보면 명확하다. 전 연인들을 한 공간에 넣는다. 그들에게 과거를 꺼내라고 한다. X룸이라는 장치로 상처를 파헤친다. 이별의 이유, 배신의 순간, 눈물. 이 모든 것이 카메라에 잡힌다. 김인하 PD는 이렇게 말했다. "X룸은 감정을 건드리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장치." 맞다. 효과적이다. 고통을 끄집어내는 데 효과적이다.
시즌4는 더 나아갔다. 한 출연자에게 두 명의 전 연인을 붙였다. 갈등의 강도를 높였다. 고통의 밀도를 올렸다. 제작진은 이것이 '서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트라우마다. 우리는 트라우마를 보고 있다.
마크 셀처(Mark Seltzer)는 이것을 '상처 문화(Wound Culture)'라고 불렀다. 현대 사회는 상처를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사고 현장에 사람들이 몰린다. 교통사고가 났다. 차들이 멈춘다. 사람들이 내려다본다. 피를 본다. 부서진 차체를 본다. 그리고 지나간다. 이것을 셀처는 '구경꾼의 정체(Gaper's Block)'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멈춰 서서 타인의 고통을 본다.
환승연애는 이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다. 사고 현장을 매주 방영한다. 출연자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상처를 까발린다. 아니, 자발적일까. 제작진은 인터뷰에서 말했다.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눈에 보이는 것처럼 말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상처가 생생해야 한다. 눈물이 진짜여야 한다. 그래야 시청자가 본다.
"고통의 스펙터클"
셀처는 현대 사회를 '병리적 공공 영역(Pathological Public Sphere)'이라고 정의했다. 사람들은 충격, 트라우마, 상처를 보기 위해 모인다.
시청자 반응을 보면 재밌다. "도파민이 돈다"고 한다. 열광한다. 댓글을 단다. 분석한다. 누가 나쁜지 토론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피로하다"고 한다. "불쾌하다"고 한다. 이 이중성이 핵심이다. 우리는 고통을 보며 쾌락을 느낀다. 동시에 그것을 보는 자신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계속 본다.
왜 보는가.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 안전의 확인이다. 저 사람은 저렇게 무너지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소파에 앉아 과자를 먹으며 본다. 나는 안전하다. 이것이 주는 안도감이 있다. 둘째, 대리 만족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극적인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낀다. 사랑, 배신, 복수, 재회. 이 모든 것을 안전한 거리에서 소비한다. 셋째, 판단의 쾌락이다. 저 사람이 잘못했다, 저 사람이 맞다, 저 선택은 틀렸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평가하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무언가 뒤바뀐다. 상처는 사적인 것이었다. 이별은 두 사람만의 일이었다. 고통은 개인의 영역이었다. 환승연애는 이것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낸다. X룸에서 눈물을 흘리는 순간, 그 고통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콘텐츠가 된다. 상품이 된다. 소비의 대상이 된다.
더 나아가, 상처는 정체성이 된다. 출연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의 이별 서사로 정의된다. "13년 연애 후 헤어진 커플", "복잡하게 얽힌 관계". 이것이 그들의 가치를 만든다. 외모나 직업이 아니다. 얼마나 극적으로 헤어졌는가, 얼마나 아팠는가. 이것이 프로그램 내에서 그들의 존재 이유다. 셀처가 말한 '상처를 통한 정체성(Identity via Damage)'이다. 고통의 크기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진짜 눈물의 시장"
제작진이 "생생한 감정"을 요구하는 것은, 출연자의 고통이 시청자에게 '실재(The Real)'의 파편으로 전달되어야만 상품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환승연애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튜브를 봐라. 브이로그를 봐라. SNS를 봐라.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전시한다. 우울증, 불안, 이별, 실패. 이것들이 콘텐츠가 된다. 조회 수를 만든다. 좋아요를 받는다. 우리는 상처 문화 한복판에 산다. 고통은 더 이상 숨겨야 할 것이 아니다. 전시해야 할 것이다. 증명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진짜 공감을 만드는가 하는 점이다. 셀처는 이것을 '낯선 친밀감(Stranger-Intimacy)'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출연자들의 눈물을 보며 친밀감을 느낀다. 그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우리는 그들의 편집된 모습을 본다. 제작진이 선택한 순간들을 본다. 진짜 그들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며 자신의 결핍을 메울 뿐이다.
환승연애4는 사랑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 프로그램이다. 로맨스를 표방하지만 본질은 트라우마다. 출연자들이 다시 사랑을 찾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그들이 무너지는 순간들이다. X룸에서 우는 얼굴,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관계가 깨지는 장면. 이것이 하이라이트다. 이것이 화제가 된다.
우리는 이것을 알면서도 본다. 불편하다고 말하면서도 클릭한다. 이것이 2026년을 사는 방식이다. 타인의 고통을 보며 자신을 확인한다. 상처를 소비하며 하루를 보낸다. 병리적 공공 영역에 자발적으로 입장한다. 그리고 다음 에피소드를 기다린다. 다음 사고를 기다린다. 다음 눈물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