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배우다

당신이 아침에 회사에 출근할 때 쓰는 표정이 있다. 상사 앞에서 쓰는 표정이 있고, 동료 앞에서 쓰는 표정이 있다. 연인 앞에서 쓰는 표정도 다르다.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세상은 무대이고, 당신은 배우라는 것을.

17세기 스페인의 예수회 사제 발타자르 그라시안(Baltasar Gracián)은 이걸 '대우주 극장(El gran teatro del Universo)'이라고 불렀다. 세상은 거대한 연극 무대다. 우리는 모두 배우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라시안의 소설 『비평가』에서 주인공 안드레니오는 동굴에서 세상으로 나온다. 그가 본 것은 화려한 무대였다. 사람들은 웃고, 울고, 춤추고, 싸웠다. 모든 것이 생생해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진실이 드러났다. 무대 뒤에는 기계장치(tramoyas)가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은 정교한 연출이었다. 미덕처럼 보이는 것은 위장된 악덕이었다. 선한 사람처럼 보이는 자는 가면을 쓴 사기꾼이었다.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20세기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은 같은 구조를 '상징계(Symbolic)'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언어와 규칙으로 구성된 무대다. 당신이 '직장인'이라는 역할을 맡는 순간, 당신은 '직장인'이라는 기표를 연기한다. '좋은 부모'라는 역할을 맡으면 그 기표를 연기한다. 역할이 먼저고, 당신은 나중이다.


우리는 무대 위에 던져졌다. 배역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라시안이 말한 기만(Engaño)의 핵심은 여기 있다. 세상은 겉보기에 견고해 보인다. 사회적 역할, 도덕적 규범, 성공의 기준. 이 모든 것이 마치 자연법칙처럼 당연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무대 뒤를 보면 다르다. 그곳에는 기계장치만 있다. 사회가 만든 합의일 뿐이다. 라캉은 이것을 '대타자(the big Other)'라고 불렀다. 대타자는 당신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그 목소리를 내면화하고, 그것이 당신 자신의 욕망인 줄 착각한다.

가면무도회는 계속된다. 사람들은 서로의 가면을 보고 반응한다.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라캉은 이것을 '상블랑(Semblant)'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가장(假裝)으로 소통한다. 당신이 회의실에서 고개를 끄덕일 때, 당신은 정말로 동의하는가? 아니면 동의하는 척 연기하는가? 구분이 안 된다. 연기와 진짜의 경계는 사라졌다.

그라시안이 통찰한 가장 냉혹한 진실은 이거다. 사람들은 남이 속는 것을 보고 웃는다. 하지만 자기가 속고 있다는 건 모른다. 무대 위에서 다른 배우가 실수하면 관객은 비웃는다. 정작 자신도 다음 장면에서 똑같이 실수할 텐데. 그라시안은 이것을 "입구에는 기만이 있고, 출구에는 환멸이 있는 구조"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울면서 태어나고, 환멸하며 죽는다.

라캉은 이 환멸을 '환상의 횡단(traversing the fantasy)'이라고 불렀다. 분석의 끝에서 환자는 깨닫는다. 대타자가 제공한 환상이 허구였다는 것을. 사회가 약속한 '행복한 삶'의 공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대 장치를 목격하는 순간, 연극은 끝난다. 그리고 실재(the Real)와 마주한다. 실재는 무대 뒤의 텅 빈 공간이다. 거기에는 의미도 구원도 없다.


세상이 연극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두 가지 선택지를 갖는다. 무대에서 내려오거나, 더 잘 연기하거나.


그라시안의 대답은 명확했다. 더 잘 연기하라. 그는 '통찰과 가상(Simulación)'의 이중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 무대 장치의 이면을 꿰뚫어 봐라. 사회의 기만 구조를 이해하라.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가면을 써라. 당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마라. 필요한 외양을 연출하라.

이건 위선이 아니다. 생존이다. 라캉이 말한 "속지 않는 자들이 헤맨다(Les non-dupes errent)"는 경고를 기억하라.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고 냉소하며 무대에서 내려오면, 당신은 그저 방황할 뿐이다. 무대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실재는 살 수 없는 공간이다.

진짜 현자는 무대의 규칙을 안다. 그리고 그 규칙을 능숙하게 활용한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연기한다. 가족 앞에서 필요한 가면을 쓴다. 하지만 그는 안다. 이것이 연기라는 것을.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배우이자 관객이다.

이게 그라시안과 라캉이 말하는 윤리적 주체다. 환상을 횡단했지만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자. 가면이 가면임을 알지만 여전히 쓰는 자. 연극이 연극임을 알지만 끝까지 연기하는 자.

당신은 이미 무대 위에 있다. 극장을 나갈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더 나은 배우가 되는 것뿐이다. 그라시안이 말했듯, 세상은 가면무도회다. 문제는 가면을 쓰느냐가 아니다. 어떤 가면을 쓰느냐다. 그리고 그 가면 뒤에서 당신이 얼마나 깨어 있느냐다.

연극은 계속된다. 막은 내리지 않는다. 당신은 다음 장면에서 어떤 배우가 될 것인가. 그라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라캉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무대 장치를 보여줬을 뿐이다.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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